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조선 제10대 왕으로, 조선 역사에서 가장 폭군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극단적인 정책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는 개혁적인 정치를 펼쳤으나, 점차 폭정으로 치닫았으며,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인해 폐위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연산군의 일대기와 그의 정책, 그리고 폭군으로 불리게 된 과정과 그에 대한 재평가까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연산군의 즉위와 초기 통치
연산군은 1476년(성종 7년)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이융(李㦕)이며, 성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년기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성종의 다른 후궁들과 갈등을 빚었고, 성종에게 폭언을 하는 등 문제를 일으켜 결국 폐위되었습니다. 이후 윤씨는 1482년(성종 13년)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으며, 연산군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존재를 부정당한 채 성장하였습니다. 연산군은 왕세자로서 철저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교 사상과 정치 이론을 익혔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성종은 연산군에게 좋은 군주가 되기 위한 덕목을 가르치려 노력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성장하면서 내면의 갈등을 품게 되었습니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면서 연산군은 19세의 나이로 조선의 10대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즉위 초기의 연산군은 개혁적인 군주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성종이 추진했던 유교적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보다 현실적인 국정 운영을 시도하였으며,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민생 안정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특히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세금 제도를 정비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조치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군사력 강화를 위해 병권을 정비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정책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적인 기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연산군은 즉위 후 몇 년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고, 이 사건은 그의 정치 성향을 급격하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신하들을 적대시하며, 정치적 숙청을 시작하였습니다.
2. 연산군의 변질과 폭정의 시작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후, 조정 내의 신하들을 불신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더욱 강력하게 하기 위해 신하들에 대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탄압은 크게 두 차례의 사화(士禍)로 이어졌으며,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498년, 연산군 즉위 4년 차에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신진 사림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사림파는 조선 사회에서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세력으로, 성종 대에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림파와 기존의 훈구파 세력 간의 갈등은 지속되고 있었으며, 연산군은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이 문제가 되어 발생한 사건으로, 이는 중국 명나라의 충신 의제를 기리는 글이었으나, 훈구파는 이를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연산군은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였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1504년에는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신하들을 숙청하기 위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생하였습니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성종의 후궁들까지도 희생되었습니다. 갑자사화는 단순한 정치적 숙청을 넘어 왕실 내부까지 피바람을 일으킨 사건이었으며, 이후 조정은 연산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습니다.
3. 연산군의 최후와 중종반정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하자, 조정 내부에서는 더 이상 그를 왕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신하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숙청과 가혹한 처벌은 조정의 고위 관료들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연산군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1506년 9월 2일(음력),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의 대신들은 군사를 동원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켰으며, 연산군은 결국 왕위에서 쫓겨나고 동생인 이역(李懌)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반정군은 궁궐을 기습하여 연산군을 체포하였으며, 이후 그는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된 연산군은 절망과 고독 속에서 점점 쇠약해져 갔으며, 결국 1506년 말, 31세의 젊은 나이에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연산군의 이야기는 단순한 폭군의 몰락이 아니라, 권력을 오남용한 군주가 어떻게 역사에서 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실패는 조선 왕조의 정치 체제를 다시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조선은 연산군과 같은 폭군이 다시 등장하지 않도록 더욱 신중한 정치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습니다.